오늘 녹차를 만들려다 한가운데가 거의 반토막난 찢어진 티백을 보고 이걸 어떻게 살릴지 생각을 해 보고 있었다. 별의별 궁리를 해 보다가 이 티백이 얼마인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녹차 한 팩에 얼마, 묶음이 몇 개, 그 묶음 안에 티백이 몇 개인지 계산을 하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그냥 찢어진 티백을 버리고 새 것을 꺼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일들이 많아졌다. 실제로 내 하루를 보면 숫자를 종일 접한다: 출근하면서 직진을 해서 걸리는 시간 몇 초, 다음 신호등까지 몇 초를 계산하면서 원래 8-9 분의 출근길 걸음을 5-6분대로 줄이니 매일매일 출근길은 무슨 걷기 경주 같다. 회사에서는 오늘 나의 값어치를 메겨주는 숫자들이랑 씨름하니, 말할 것도 없다. 오늘 나의 등수, 승률..
지난 주 나는 모아둔 휴가를 썼다. 주말까지 껴서 6일의 나름 긴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친구들을 보러 뉴욕이나 서부에 가려 했었으나 출발 며칠 전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잠시 모든 것을 보류하고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휴가를 쓰기 전 금요일, 회사에서 트레이딩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은 돈을 잃었고,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는 무엇을 하는지도 이해를 못 했으며, 살은 4-5키로가 급격하게 쪘고, 설거지는 거의 일주일치가 밀려 있었다. 주변인들이 다들 첫 휴가 때는 어디 놀러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현실에서 도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주 주말, 집 정리를 하다가 군대 수첩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노트에 할 일을 정리해 놓으면 머..
목요일 퇴근하자마자 친구랑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찾아서 보러 나가지도 않고 알게 된 지 오래 된 사람도 아니었는데 뭔가 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편함에서 나오고 싶었어서 따라가 봤다. 나는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무지한 사람이다. 일이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가면서 살짝은 힘든 기색이 느껴졌다. 요즘 트레이딩도 어렵고 이번 주 몇몇 사람들이 놀러오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영화관에 막상 가니 정말 고요하고 편안한 느낌을 정말 많이 받았다. 50석 정도 되어 보이는 극장같은 분위기에, 정말 고요하고 조명도 은은한 따뜻한 분위기를 줬다. 직장에서의 번쩍번쩍한 화면들과 시끄러운 알람 소리, 사람들의 욕설들과 너무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영화 시작부터 색다른 느낌..
오늘 이케아 책장를 조립하다가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풀 냄새, 흙 냄새처럼 항상 맡는 냄새들은 그렇게 구체적인 시절이 떠오르진 않지만, 이케아 나무 냄새같은 특이한 냄새들은 간간히 나를 구체적인 시점의 과거로 돌려놓는다. 이케아 책장은 참 신기하다. 15년이 지나도 흰색으로 페인트칠한 나무의 촉감이나 냄새던, 참 이해하기 쉽게 만화같이 그려놓은 설명서던 정말 변한 게 하나 없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 인기가 많고 꾸준히 팔리는 것을 보면 정말 명작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나는 이케아 가구 조립을 참 좋아했다. 레고 조립같이 창의적이지는 않아도 실제로 내가 몇 년같을 쓸 만큼 크고 복잡하고 쓸모있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든다는 게 뿌듯했다. 어릴 적에 그 6단 서랍을 척척 혼자 조립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
돈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기피되는 경향이 있다. 은행에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할 때, 회사에 돈을 더 달라고 할 때, 학교에 돈을 덜 내고 싶다고 할 때, 정말 우리는 쉬운 이야기를 돌리고 또 돌려서 이야기하고 또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를 지나야 한다. 이름도 '대출, 연봉, 장학금' 으로 정말 제각각이다. 자본주의의 최고봉 미국은 더 심한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심지어 아직도 모르면 찾아보면서 배운다) 돈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money, allowance, fund, payment, balance, premium, cash, bucks, currency, .... 정말 끝도 없이 나온다 돈 이야기가 부끄럽다고 생각한건지, 나도 돈 이야기를 입밖으로 잘 안꺼내고 살아..

벌써 입사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함께 교육받던 인턴들은 하나둘씩 떠나가고 나는 점점 정직원같이 대우해 주려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점심시간이 끝나고 IT 관리하는 직원이 와서 오늘 장이 끝나면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나와 인턴들이 지내던 오피스 구석 자리에서 오피스 한 가운데 자리로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한 생각이 앞섰다. 나는 아직도 오피스가 낯설다고 생각이 드나 보다. 장이 끝나고 오늘 하루를 정리하기 무섭게 직원이 와서 컴퓨터와 모니터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새 자리에 나를 앉혔다. 이제 앞으로 내 오른쪽 자리에는 하루에 수십번은 욕하는 4-5년차 트레이더가 앉을 것이고, 왼쪽 자리에는 십분마다 경제 뉴스를 소리치는 2년차 트레이더가 앉을 것이다. 앞으로 내 자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이 곳에..
요새 생각이 유독 드는 주제가 도파민이다. 얼마전에 이사를 한달에 두번씩 하는 타지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부분이 있다. 시간관리와 식습관이다. 한달의 절반을 짐싸고 짐풀고 무거운 것을 군대 때보다 더 들고 다니며 힘들게 살다 보니 나머지 쉬는 기간에서는 보상 심리가 무한정하게 생긴다. 밥을 지난 달에는 해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고 매번 시켜먹거나 라면을 끓여먹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물을 구하기도 힘들어서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콜라를 6병씩 사서 콜라만 먹고 살았었다. 더군다나 예전에 살던 집에서 Halloween 때 남은 초콜릿을 한 무더기를 줘서 초콜릿을 지난 한달반 가량 매일 미니 스니커즈나 리시스를 6개씩은 먹은 것 같다. 시간도 흥청망청 썼다. 며칠 내내 에어 매트리스에서 ..
말 대신 논리로만/숫자로만 대화하고 표현하고 사고하는 방식의 삶을 보내다 사회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 주제로 대화를 하니 마치 내가 인간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가는 느낌이 든다. 매년 겨울은 춥지만 봄, 여름을 겪고 가을이 지나 갑자기 추워지면 겨울의 추위를 다시 실감하는 순간이 있듯이 오랜만에 새로운 사회에서 다시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기를 겪으니 새로운 것들을 실감하는 순간이 온 것 같다. ----------------------------------------------------------------------------------------------------------------------------------------------- 사람이 말을 하는 이유에는 정보..

최근 들어서 브런치를 뒤늦게 알게 되면서 마치 중학교 때 교과서를 읽은 이후로 처음으로 단어들을 찾아가면서 글들을 읽고 있다. 요새 SNS와 디지털화 등에 찌들어 사람들은 Fragmented attention을 겪는다 한다. 긴 영화보다 짧은 넷플릭스 에피소드, 그보다 더 짧은 유튜브 영상이 더 재밌고, 많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온다고 한다. 나도 그런 영향 때문인지 긴 책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영상과 사진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그나마 글을 읽는 것이 조금이나마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 그래도 퇴근길에 브런치 글들을 읽으면서 다른 세상의 경험과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배우려고 한다. 브런치의 한 글에서 어쩌다 '고양' 이란 단어를 보게 되었는데 마치 내가 지금 한달간 미루던 ..
이번 상담사는 심리학을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내 꽉 찬 머리 용량을 비워내라고 내 생각이나 궁금점들을 적고 해소하고 자라고 권고했다. 안타깝게도 내 완벽주의자 특성 때문인지 단순히 몇 자 끄적이는 것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는다. 글을 쓰고 내 생각들의 점들을 연결해야 직성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오늘은 다소 추상적인 ‘나에게 인과관계의 의미’ 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인과관계란 단어는 나에게 참 어려운 단어다. 그 뜻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으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 개인적인 이견으로는 이과적이지 않고 숫자가 아닌 것들의 인과관계는 참 모호하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 같은 명제는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