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
어제 저녁을 평소보다 소식해서 그런가, 출근을 하면서 배가 고픈게 느껴졌다. 매일 아침 회사에서 프로틴바 하나와 물 한컵으로 아침식사를 대체하는데 오늘따라 그걸 먹고도 장 개장 시간에 허기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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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인 계좌로 테슬라 옵션을 좀 사고 팔아서 수익을 냈다. 신난 나머지 오늘도 옵션을 기웃겨리다 어제 실적발표가 나온 테슬라가 생각났다. 테슬라는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실적이 잘 안나온 모양인데 일론이 어떤 또 묘수를 썼는지 어찌저찌 주가는 또 밤새 올라있더라. (238->257)
오늘 뭔가 일어날 것 같았다. 배가 고픈 나는 뭐를 좀 사거나 팔거나 해야 될 것 같았다.
Technical Analysis 에 별 재능은 없는 것 같지만 저 선을 보니 뭔가 260을 넘을 것 같진 않았고, 오늘같은 실적 직후 날은 테슬라 옵션을 팔아야 되는 날 같았고 (IV Crush), 나는 아직 미국 주식들 하향세가 계속될 것 같았다.
콜을 팔아야 할 것 같아서 4/25에 만료하는 270-275 Call Vert 를 6개 팔았다가, TSLA가 급등하는 걸 보니 손에 땀이 뻘뻘 흐르기 시작했다. 판 가격의 두 배에 거래가 되는 걸 보고 아, 이걸 손절해야 되나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이 때 몇 개 더 팔았다. 다행히 TSLA 는 그 이후 하락세를 타 본전 이상은 건졌다. 심적으로 부담이 컸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심 메뉴인 팟타이, 타이 커리, 타이 볶음밥, 스시롤이 나오는 날이었지만 밥이 잘 안 넘어갔다.
점심을 먹고도 배가 고팠는지 더 욕심이 났다. SPY 행보를 보니 온갖 지표가 나왔는데도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쳐지는 것 같아 콜을 몇 개 더 팔았다. 원래는 이렇게 베팅을 할 게 아니라 좀 헷징하는 식으로 가야 되는데, 배가 고팠다 보다. 욕심을 좀 부렸다. 밤새 주식이 급등하면 욕심을 낸 죗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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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 와중에도 오늘 회사 옆자리 친구가 농구를 가자 해서 갔다. 요즘 다들 게을러졌는지 농구를 슬슬 안나오기 시작하는데 내 옆자리 친구와 나는 열심히 가려고 노력한다. 얘도 참 신기한 친구인데, 회사 사람들은 다음에 여기에 소개를 따로 해 봐야겠다.
농구를 하고 오니 머리 예약이 얼마 뒤더라. 급하게 밥을 때우고 나갈까 싶었지만 오늘따라 이 배고픔이 좋아서 씻고 바로 웨스트룹까지 걸어 갔다. 당이 떨어질까봐 사탕을 한두개 입에 물고 갔는데, 날씨도 너무 선선하고 좋았다. 45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공복 유산소 하는 기분으로 신나게 걷다 보니 금방이었다.
집에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오늘 집에 가서 남은 1-2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고민했다. 일단 오늘 알차게 보낸 것 같아 일기를 써야 할 것 같았고, 요즘 몇십 일 째 푸는 데일리 체스 퍼즐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역에서 내려 집에 걸어가는데 몸이 건강해 지는 게 느껴졌다. 맑은 공기, 햇빛, 그리고 적정량의 유산소까지.
컨디션이 좋다 생각해서 체스 앱을 켰다. 이렇게 배고플 때 은근 집중이 잘 되고 머리가 말똥말똥한데, 오늘 유난히 느낌이 좋았다.
오늘 체스 퍼즐들이 술술 풀렸는데 나중에 보니 1800점대 어려운 퍼즐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1500 점대 퍼즐에서 끙끙댔는데 오늘 이상하게 길이 술술 보였다.
이젠 너무 배고파 나중에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2시간도 안 되서 자야 하니 냉장고를 열어 봤다. 내가 어제 만들어놓은 삶은 계란이 몇 개 있었다. 식초도 넣고, 소금도 넣은 물에 삶은 잘 까지는 계란이.
계란 껍질은 잘 익은 귤처럼 술술 벗겨졌다. 노른자는 퍽퍽했지만 흰자는 푸딩처럼 부드러워 너무 좋은 밸런스 같았다. 배고프니 별의별 게 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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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배고픔이 좋다. 배고픔은 배부르고 게으른 나에게서 포만감과 안정감을 뺏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의 소중함들을 일깨워 준다. 배고픈 나는 더 성실한 사람으로, 더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더 도전적인 사람으로 바뀐다.
‘헝그리 정신’이란 게 이런 걸까?
헝그리 정신은 의지만이 아니라, 감각을 살리는 과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