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지난 주 나는 모아둔 휴가를 썼다. 주말까지 껴서 6일의 나름 긴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친구들을 보러 뉴욕이나 서부에 가려 했었으나 출발 며칠 전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잠시 모든 것을 보류하고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휴가를 쓰기 전 금요일, 회사에서 트레이딩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은 돈을 잃었고,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는 무엇을 하는지도 이해를 못 했으며, 살은 4-5키로가 급격하게 쪘고, 설거지는 거의 일주일치가 밀려 있었다. 주변인들이 다들 첫 휴가 때는 어디 놀러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현실에서 도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주 주말, 집 정리를 하다가 군대 수첩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 노트에 할 일을 정리해 놓으면 머리 용량을 뭘 해야될지 기억하는 데 쓰지 않고 그 머리 용량을 일 자체를 하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에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 유산소 운동은 머리를 맑게 한다. 두뇌 회전에 도움을 주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든다.
- 심장이 혈액을 몸의 곳곳에 펌핑해주면서 산소공급을 해 주면서 뇌에도 좋은 연료(혈액) 가 제공된다.
- 아침 스트레칭은 잠을 깨게 할 뿐만 아니라 혈액 순환에 도움을 주고, 근육통이나 뭉친 부분을 풀어준다.
-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그 잠에서 갓 깬 움츠린 상태로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다 일찍 잠에 드는 것은 쓰잘데기 없는 호르몬들을 경험하지 않게 한다.
- 늦은 밤 호르몬은 우리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고 야식을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 그냥 일찍 자 버리면 그런 생각은 일절 없어지고 다음날 오히려 상쾌한 아침과 생산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새벽 1시에 술을 마시지, 아침 7시에 술을 마시겠는가?
- 모든 행동에는 연쇄 반응이 있다.
- 야식을 먹으면 다음날 위가 늘어나서 더 배가 고파지고 허기짐을 더 쉽게 느낀다. 그럼 결국 다음날도 또 야식을 찾기 쉽다.
저 때에 비해서 내가 너무나 많이 퇴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 휴가 때는 군대 체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군대 훈련소 때 했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 보내보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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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전날, 핸드폰을 아예 충전을 하지 않고 자서 일어날 때쯤 핸드폰은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아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면서 창가쪽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멍하니 쳐다봤다. 직장인으로써 주중에 사람들 출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일인 것 같다. 평소에 보지 못하는 풍경들이다 - 출근길의 직장인들, 자녀들을 학교에 등교시키는 부모들, 분주히 길을 치우는 청소부 분들까지. 7시반부터 8시반까지는 마치 페로몬으로 움직이는 개미군단처럼 앞사람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줄줄히 건물들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개미들이 페로몬으로 조종되는 것처럼, 우리는 돈이 페로몬의 역할을 하는 것인가? 행복이라는 페로몬이 있을까? 등의 망상을 한시간 정도 하니 너무 생각들에 잠식되는 것 같아서 잠시 창밖을 보는 것을 그만두고 집을 쓱 둘러봤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러 내려갔다. 아마 2018년 이후 처음으로 아침 운동을 간 것 같다.
신기하게도 이 날 운동이 뭔가 가장 개운하게 되었다. 아침에 구부정한 자세로 핸드폰을 보지 않고, 일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고, 아침에 열심히 뛰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거울신경이 자극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운동을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남은 하루를 보내려니 벌써부터 기분이 상쾌하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난 출근하는 월요일까지, 6일동안 매일같이 아침에 몇십 분은 창밖을 보던가 명상을 하고, 그 후 운동을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다시 군대에서 적은 노트를 읽어 보니 다 맞는 말들이었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니 하루를 더 생산적으로 보내고, 몸과 머리가 맑아지니 무엇을 하던 효율이 좋아진다. 그렇게 올바른 생활을 하며 열심히 하루를 보내니 저절로 수면의 질도 좋아지고, 늦은 밤 호르몬이 분비되기 전 시간에 잠이 들어 버린다. 고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며, 또다시 헬스장에 가는 선순환 (연쇄 반응) 이 일어난다.
강제적으로 현대인은 여유를 가져야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휴가 때 어디 놀러 가서 정신없는 생활을 했으면 절대 하지 못할 생각들이란 것을 직감했다.
문득 군대 때 잠시 발목을 다쳐서 어떤 격리된 방에 갇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회에서 얼마나 양아치던지, 공부를 하지 않던지, 범죄자에 근접한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격리된 방에 갇혀 있으면 너무 지루한 나머지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세계 문학 100선 같은 책을 펴 보게 한다.
좀 더 나아가 별의별 범죄자도 감옥에 가면 책을 보기도 하고 반성을 하고 자아성찰도 하면서 사회적 동화가 되듯이, 나도 자극적이고 치열한 곳에서 잠시 빠져나와 도를 닦아야 되는구나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내가 어렸던 대학교 시절에 미친듯이 이곳저곳 약속을 잡고 술을 퍼마시던 시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알코올 섭취, 어떻게든 나가서 놀 궁리만 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집에 있을때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행위는 신체와 뇌를 썩게 만들만도 했다.
이렇게 6일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선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다 다가오는 월요일, 기대되는 출근날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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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출근을 하니 또 3일 크리스마스 연휴가 왔다.
금/ 토/ 일요일에는 미술관을 가던, 쇼핑을 가던, 친구집을 가던, 뭔가라도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을 하다가 크리스마스 당일 월요일이 되니 막상 모든 곳이 닫고 밖에 사람들도 없어서 할 것이 정말 없었다.
휴가 때 바른 생활 연습을 좀 해서 이제 아침 운동과 샤워는 기본이 되었다. 이렇게 맑은 정신 상태에서 향초를 하나 피우고 잔잔한 음악을 틀면서 내가 뭘 해야 되나 곰곰히 생각을 하다 여러 가지 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올해 6월부터 미뤘던 가계부 적기, 신용카드 신청 알아보기, 회사 건강보험 관련 공부, 안 입는 옷들 팔기 등을 하나하나 끝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내 휴일 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돌아보면 어디 가서 정신없는 자극적인 것을 찾지 않고 잔잔하게 나 스스로를 잘 돌아보고 자기개발을 한 기간이었던 것 같다. '휴일' 이라는 단어 자체가 '휴식하는 날'에 더 가까운 뜻인 것처럼 애초에 그렇게 보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노는 날' 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 내일 출근이 기다려진다.